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상 파괴주의 (문단 편집) === 성상 파괴주의의 종말 === 820년 12월 25일, 레온 5세는 황궁 성당에서 [[성찬예배]]에 참석하던 도중에 미하일의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 이 전대미문의 암살극으로 집권한 미하일 2세는 종교 정책에 있어서는 레온 5세와 비슷한 입장을 취했다. 즉, 성상 파괴 운동을 지속하면서도 굳이 성상 옹호론자들을 박해하지 않고 내버려둔 것이다. 그의 뒤를 이은 아들 [[테오필로스]]도 아버지처럼 성상 파괴론자였으며, 당대 최고의 성상 화가 라자로스를 비롯한 여러 인사들을 탄압했다. 그러나 이 무렵 성상 파괴 운동을 주도한 이들의 영향력은 갈수록 약화되었다. 성상 파괴가 처음 시작되었던 동방의 속주들은 상당 부분 사라센에게 넘어갔고 남아있는 속주의 주민들도 이슬람교와 명백하게 비슷한 교리인 성상 파괴에 대해 불신을 품었다. 또한 인문주의가 확산되고 시각적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풍조가 퍼졌으며 백성들은 평화롭고 자신감이 넘쳤던 옛 시절의 낯익은 그림들을 갈망했다. 그러던 842년 1월 20일, 테오필로스가 이질에 걸려 38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성상 파괴의 시대는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테오필로스의 황후 [[테오도라(9세기)|테오도라]]는 어린 아들 [[미하일 3세]]를 대신해 통치하며 삼촌 세르기우스 니케티아테스, 오빠 [[바르다스]] 등을 측근으로 삼았다. 그후 그녀는 843년에 제7차 세계공의회를 소집하여 성상 파괴론자들을 파문하고 성상 공경을 공식적으로 확정지었다. 843년부터 동방 정교회에서는 사순대재 첫째 주일을 "정교주일"로 정하고 성화상의 승리로 정교회와 교부들의 가르침을 통하여 모든 정교회의 교리와 규범은 참 진리에 기초함을 선포하는 날로 지내고 있다. "정교주일"에 정교회에서는 성화상을 갖고 성당 주위를 돌며 특별성가와 기원을 바친다. 이후 성상 반대는 두 번 다시 제기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